호남의
거부 김경중(境中)의 아들, 김기중(基中)에게 입양.
13세때 사설 영어 학숙에 다니며 송진우(宋鎭禹), 백관수(白寬洙)등과
교우. 190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후
귀국하여 운영난에 빠진 중앙중학교를 인수, 1917년 교장에 취임했다.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 사장이 되어 경제 자립과 민주자본육성에노력하는
한편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제 2대 사장에 취임,회사운영을
본궤도에 올려놓은후 1927년 사임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자
5천원의 위문금을 중국 영사관에 보냈다. 이듬해 보성전문학교를
인수 교장에 취임, 193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자 손진태와 골동품을
수집, 외국유출을 막았다. 해방이 되자 미 군정청 수석고문관을
지내고, 1946년 1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가 되었고, 이어 동아일보사
제 9 대 사장,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 9월에는 한국민주당
당수에 선임되었다. 1947년 신탁통치 반대투쟁위언회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으로 1950년 제 2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가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5월에 사임했다.
1952년 12월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어 야당인으로 활약했다.
국민장으로
장례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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