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효의 아들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광해군 1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각각 급제, 정언ㆍ교리ㆍ직제학등을 역임, 광해군
7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이 왕의 뜻에 거슬리어 파직되었다.
서인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 영수로서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대제학을 거쳐 예조, 공조,
형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예조판서로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이듬해 강화되자 파직되고, 그로부터 3년 뒤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 3년 후에 의주에 돌아왔으나 명나라와 밀무역 하다가
청나라에 잡혀갔던 이계(李桂)가, 조선이 명을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고
고해 바쳐 최명길(崔鳴吉)ㆍ이경여(李敬與)등과 함께 심양에 잡혀갔다. 1645년
석방되자 귀국 후 좌의정ㆍ영돈령부사등을 역임했다.
숭명파로 절의가
있어 신망을 받았다. 글씨는 동기창체를 잘썼다.
효종 묘정에
배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