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감정 윤변(忭)의 아들이며 윤두수(斗壽)의 아우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주서(注書)·주부(主簿) 등을 거쳐 뒤에 교검, 병조·이조의 좌랑, 지제교·교리
등을 지내고, 1567년 사가독서를 했다. 이어 사인·집의·응교를
지내고,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 다음해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했다. 귀국 후 부제학·대사헌·경기도
관찰사·강릉부사·개성부 유수·황해도 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9년 공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다시 종계변무를
했다. 돌아온 후 형조판서에 승진, 이어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 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우찬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왕을
호종, 지경연사·양관 대제학·지춘추관사·지성균관사 등을 겸임했고,
한편 문안사·원접사·주청사 등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 광녕에
세 번, 요동에 여섯 번이나 왕래하며 국난 극복에 힘썼다. 그 후
좌찬성이 되어 판의금부사를 겸임하고, 1604년 호성공신 2 등에 봉해졌다.
성리학에 밝아 이이(李珥)와도 막역한 사이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거장으로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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