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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箕子朝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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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에 와서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이어 건국(建國)하였다고 하는 나라.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古朝鮮) 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고조선(古朝鮮)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 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古朝鮮)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古朝鮮)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箕子朝鮮)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