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로 하고있으나 배현경은 원래 이름이 성이 없이 백옥(白玉)이었으며
나중에 성을 배씨라고 했다고 한다. 중시조 배현경은 담력이 크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궁예가 고구려에서 태봉이란 나라를 세울때에 이를 도와
행오에서 출발하여 기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등과 함께 궁예를 추출하기로 하고 왕건에게 왕창근, 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하고
개국 일등원훈에 서훈되었으며 '고려사'에 고려 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919년(고려 태조 2)에 도읍지를 송도로 옮길때
개주 도찰사가 되어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공을 세우고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936년(태조 19) 그가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하고 나가자 죽었다. 왕이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995년(성종 15)에 평산 태백성에
태사사를 세워 매년 봄, 가을에 향사한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 제왕을 제사지낸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으며, 그 밖에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평산 태백산성의 태사사(太師祠)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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