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고종 30) 전환국 방판으로 도일,
서양식 화폐의 주조를 시찰하고 돌아와 신화폐를 주조했다. 1894년
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이 발발, 청. 일 군대가 주둔하게 되자 개화친일 정객이 되어
보수친청의 민영준과 함계 사태수습에 진력, 우포도대장을 거쳐
이 해 외세에 의해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경무사를 거쳐 신설된 군국기무처의
의원이 되었다. 이어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탁지부
협판(度支部協辦)을 거쳐 경무사, 다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자
군부대신에 올랐다. 이 해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되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책임을 지고 한때 파면되었으나 곧 중추원의관(議官)에 복직하여
다시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키는 주동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로 인해 3년 징역을 받았다. 1896년 아관파쳔 때 특사되어 경무사에
기용, 이어 중추원 1등의관에 전임되고 독립협회에 참여, 회장을 지냈다.
1898년(광무 2) 김재풍(金在豊) 등과 함께 고종의 양위를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 1900년 일본공사의 알선으로 귀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앞서 이준용(李埈鎔)의 모역사건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사형당했다.
뒤에 1907년(융희 1) 신원(伸寃)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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