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안석필(錫弼)은 신라 때 사람으로 그의
성장에 대해 기담이 전한다. 신라 중원 연간(中元年間)에
한 묘령의 여인이 남자의 관을 쓰고 한 살 가량의 아이를 업고 남쪽으로부터
와서 왕에게 [이 아이가 의지할 곳이 없고 붙여 둘 곳도 없으니 잘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아이만 혼자 뜰에서 울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왕이 신이 주신 아이라 하고 대궐 옆에 두고 길렀는데 10여세가되자
용모가 준수하고 기량이 출중할 뿐 아니라 시서(詩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고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왕이 기특하게 여기고 여자가
관을 썼다하여 성을 <安>으로, 남쪽으로부터 왔다는 뜻에서 본관을
남성(南城)으로, 이름을 석필(錫弼)이라 사성명(賜姓名)하였다.
장성하여 벼슬이 이찬(伊 )에 이르렀고, 특별히 왕이 노암(老菴)이라
사호(賜號)하였다. 그 후 자손이 대대로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영화를 누렸지만 모든 문적(文籍)이 실전되어 세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덕왕 때 후손 환, 공(珙), 박(璞) 3형제가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맏이가
직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멀리 염고군에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하면서
염고로 개관하였고, 이후 세계가 확실하므로 3형제를 1세로하여 세계를
계승하였다. 그러다가 공민왕 때 18세 치기(置器)가 충원백(忠原伯)에
봉해짐으로써 충원으로 다시 개관하였는데 후에 충원이 충주(忠州)로
변천됨에 따라 충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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