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 서호번의 아들이다.
13세에 "서경(書經)"을 읽고, 복잡한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을 스스로 해득했으며, 18세에는 "대학(大學)"을 읽고
격물치지의 원리를 깨달았다. 산림에 묻혀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이던
중 1519년(중종14)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현량과에 응시토록 추천받았으나 사퇴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다가 약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1522년 속리산 지리산
등 명승지를 두루 다니며 기행시 여러편을 남겼다. 1531년
모친의 뜻을 따라 생원시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개성의
동문 밖 화담에 초막을 짓고 이기의 진리탐구에 전념했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했으나 사양하고 계속 성리학을 연구, 생사일여를
주장해 노자 철학의 생사분리론과 불교의 인간생명이 적멸한다는 주장을
배격했다.
성리학 이외에도 도학을 비롯하여 수학 역학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되고,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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