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유의 14세손, 선공감역의
좌부승지를 지낸 오희문(希文)의 아들이다,
음보로 기용되어 참봉 현감 등을 거쳐,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학 사서 수찬 부교리 경성판관
안주목사 등을 지내고, 광해군 초 동래부사,호조참의,충청도 관찰사,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1613년(광해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광주목사를 자청했고, 1617년 첨지중추부사로 회답사가 되어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잡혀갔던 15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왔다. 1622년
동지중추부사로 등극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623년 인조반정
후 서인이 노서, 소서로 분열될 때 노서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 다음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했고, 돌아와
지돈령부사,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다음해
좌의정을 거쳐 162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후 영돈령부사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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