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고종 23) 박문국 주사가 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를 겸했고,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 총재비서관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1896년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외국어학교 조선어 학사로 일본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1902년(광무
6)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 천도교에 입교하고, 5년 후에 귀국,
만세보와 대한민보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3년간 복역, 출옥 후에 서화가의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했다. 해방 후 민주의원 의원, 대한독립
촉성회 회장, 전국애국단체 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6.25사변 때
피난지 대구에서 죽었다.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고, 서화의 감식에
조예가 깊었다. 장례는 사회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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