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강성 고을에서 선비인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덕재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 박사 등을 거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 원나라 순제는 최유(崔濡)가 추대하는 덕흥군을
왕위에 대립시킬 계획으로 공민왕 폐위에 가담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의충절을
내세워 강경히 거절, 이로 인하여 운남성으로 유배되었다. 원 순제는
후에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석방, 귀국케 하였는데 당시금수품으로 되어
있던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 우리나라
의류 및 경제상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공민왕은 충의에 감복하여
중현대부 예문관 제학에 임명하였으며, 1375년(우왕 1) 좌사의대부, 우문관
제학, 동지경연사에 오르고 시무팔조를 상소하였다. 그 수
전제개혁에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 이림(李琳) 등의 편을 들어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으므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햐여 감우의
뜻을 품고 은거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하였고
조선의 태조가 친히 불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 또한
지극하여 왕의 특명으로 효자비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라
명명하였다. 성리학에도 밝았다.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로
강성군(江城君)에 봉해지고 부조묘를 세웠으며, 1440년(세종 22) 영의정에 추증,
부민후에 추봉되었다. 1461년(세조 7) 사당이 세워졌다.
남평의
장연서원, 산청의 도천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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