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여러 대가의 서적을
설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다. 1552년 (명종 7) 천거로 전생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다음해에 사도시 주부,
1555년
단성현감, 1566년 상서원 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이 해
왕의 부름으로 왕을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두류산 덕산사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고, 수차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했다. 문하에서 김효원(金孝元),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했다.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 광해군 때 영의정이
더해졌다.
진주의 덕천서원,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南冥集), 남명학기(南冥學記),
파한잡기(破閑雜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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