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 김홍우(弘 )의 아들.
조식(曺植)ㆍ이황(李滉)의 문인.
명종 20년 진사가
되고, 이 해 알성문과에 장원, 병조 좌랑ㆍ정언ㆍ지평을 역임하고,
선조
6년 사가독서한 후, 이듬해 다시 지평이 되었다. 선조가 득위한 뒤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이 해 이조 정랑에 천거되자
사림파의 구세력인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에 의해, 앞서 그가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으로서 그에게 아부했다 하여 거부 당했다.
|
그러나 결국 이조 정랑에 기용되었으며 이어 이듬해
심의경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 정랑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전랑의
관직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 두 사람의
반목이 마침내 그를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파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 동인ㆍ서인의 양파로 갈라졌으며, 그의
집이 동대문밖에 있었다 하여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다. 이에
당쟁의 폐해를 우려한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理)등의
조정 책으로 그는 부령 부사, 의겸은 개성부 유수등 외직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뒤에 삼척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선조 16년 당쟁이 더욱 심해지자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그후 10 여 년 간 하직으로만 있으면서
당쟁이 일어난 데 대해서 크게 책임을 느끼고 시사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자숙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