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고종 13)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아극명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 부산에 있는 일본 병원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이 해 충주 덕산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도일,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의 채장법 등을
배우고 귀국,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공사관
의관으로부터 서양의학을 지도받았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에
급제, 전적·지평을 역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1887년 장령으로
시폐를 논하다가 유배, 1892년 석방 후 동래부사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899년(광무 3) 학대대신에게 청하여 경성의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했고,
1905년(광무 9) 식정국문 6개조를 상소, 국문연구원이 되었다.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큰 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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