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말에 정부 파견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보병중의로 있다가 1919년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1920년 서로군정서를 조직했고, 청산리
전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피해 흑룡가으로 이동,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으로 있다가 흑사사변이 일어나자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만주로 탈출했다. 1925년 양기탁(梁起鐸), 오동진(吳東振)
등과 정의부를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고, 이해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체인 군민회의가 설치되자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2년 동아혈성동맹의
간부로서 각지 항일단체를 규합하고, 1933년 치치하르에 잠입,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했다. 이해 재만 독립군을 산해관으로 이동시켰고, 낙양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고 그 총책임자가 되었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1945년에 행방이 되자 귀국했다. 그 후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여 단장이되고,
무임소 장관, 제헌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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