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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rname.info :+: 김좌진(金佐鎭) - 신안동김씨(安東金氏)

 

 김좌진 (金佐鎭)

 [ 1889년11.14 ∼ 1930년1.24 ]


   독립운동가.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김형규(衡奎)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 ·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盧伯麟) ·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 참모총장) ·박영희(朴英熙, 부관) ·이범석(李範奭, 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 ·참의부 ·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안동김씨(安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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