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서 수업했는데, 정인홍이 광해군 때 대북파의 권신이
되자 그와 절교했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 사서, 정언 등을 역임, 1614년 부사직으로서 영창대군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났음을 상소했다가 10년간 제주도 대정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때에 덕변록(德辨錄),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家)를 지어 애군우국의 뜻을 토로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헌납으로 등용, 뒤에 대사간, 부제학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이조참판으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를
주장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할복자문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후 덕유산으로 들어가 모사에 살다가 5년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헌절사,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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