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서에 통달하였고, 병서를 습득하였다.
1571년 24세 때 신립(申砬)의 휘하에서 돌격장이 되었고, 1589년(선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희령경원 도호부판관이 되었으며, 후일 청주목사로 제수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김제군수로 전임되어 공주·옹인전투를 치르고,
전주 입성을 꾀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웅치 싸움에 임하였다. 그는
진중에 부하 장졸들과 충의로 임전할 것을 맹세하였고 아들 승서(承緖)에게
보내는 서찰에 '국운이 불행할 때 적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그 직무를 다하는 것이다. 나의 갑옷 속에 성명을 써놓았으니 너는
알아 두어라.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나라와 임금을 위한 마음이니
이 아비의 시신을 거두어라'는 서신을 보내고, 7월 8일 왜적과 싸우다
45세를 일기로 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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