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우왕
때
지밀직사사에 올랐으나, 유배된 조영길(趙英吉)이 도망간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아 파직되었고, 공양왕 때 이인임(李仁任) 일파로 몰려 곡주(谷州)에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뒤 다시 기용되어 1393년
(태조 2) 개성윤을 거쳐 중추원사가 되어 서강(예성강) 및 강화도의
병선을 점검했으며 이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고, 1396년 도체찰사가 되어 이키도, 대마도의 왜구를
토벌했다. 1398년(태조 7) 참찬문 하부사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을 도와 정사공신 1등으로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2) 동북면 도순문사로 영흥부윤을 겸임,
1401년(태종 1)
판삼군부사가 되고, 좌명공신 1등으로 우정승에 승진, 이어 영중추부사,
우정승 겸 판병조사를 역임하고, 1406년 김사형(金士衡)·이회 등과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彊理圖)'를
편찬했다.
1409년 태종의
처남인 민무질(閔無疾)·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연루,
창원(昌原)에 유배되었다가 죽산(竹山)에서 사형되었으며,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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