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5년(충렬왕 11) 진사로 문과에 급제,
안남서기에 보직되고, 예빈 내급사를 거쳐 지합주사, 비서랑을 지냈다.
1306년(충렬왕 32) 비서승으로 왕을 원나라에 호종했을 때 왕유소(王惟紹),
송방영(宋邦英)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충선왕을 모함하여 서홍후
전(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고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그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느나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 은거 중 심양왕 고(暠)가 원나라에서
왕위의 찬탈을 음모하자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에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충숙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으로 관동지방에
가서 백성을 안무하고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이어 군부판서에 승진,
그 후 여러 차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했고,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왕이 「조년은 늙었지만 그 뜻이 훌륭하다」하면서 정당문학에
승진시키고 다시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였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고 매일 입조할
때가 되면 왕이 용모를 단정히 고치고 대면하기를 기다렸다 한다.
1341년(충혜왕 2) 왕의 황음을 가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사직,
뒤에 성근익찬경절공신이 되어 벽상에 도형되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에
추봉되고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이 그의 인품을 논평하기를
「그는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나 후세에 있어서나 우뚝하여
고려 500년 제1인자」라고 하였다. 또한 시문에 뛰어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구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는 특히 유명하다. 성주의 안산서원,
고흥의 성산사, 산청의 안곡영당, 옥천의 평산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나려낭림고, 육교고략(六橋稿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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