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경순부 주부(慶順府注簿)가
되고, 공양왕 때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지신사에 오르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도승지 중추원
학사가 되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7년(태조 6) 대사헌을
지내고, 1399년(정종 1) 중추원사로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를 겸임하고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이어 삼사좌사·지의정부사를
역임,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芳遠, 太宗)을 도와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병조판서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제학을
지내고 다시 판사평부사가 되어 왕명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1405년(태종 5) 6조의 편제가 정해지자 이조판서가
되었다. 1407년(태종 7)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영흥부윤(永興府尹)이 되고,
이어서 찬성사로서 판의용순금사사를 겸하였다. 1410년(태종 10)
천릉도감 제조가 되어 덕릉, 안릉 등을 함흥에 옮겼다. 1412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진봉되고, 1414년 우의정에 승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황희(黃喜)와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 世宗(세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가
성산에 안치되었다. 1422년 (세종 4) 풀려나와
1424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 해 등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26년 좌의정에 전직,
이듬해 사직하였다.
시문에 뛰어났다. 김종직(金宗直)이 그를
평하기를 「그는 탁월한 것이 남달라서 읽지를 않을 책이 없고 시문이
우아하고 힘이 있으며, 정하여 지키는 바가 삼엄하고, 4왕조의 정숭을
지내면서 경제를 총리하여 시행하였기에 명성이 국내에 진동하였고,
예약과 문물이 융성하 고 화사를 간추려서 이를 꾸며 놓았으니 천하게
크게 달관함을 시문으로 다 표현한 분이 선생 한인가 하노라」하였다.
성주의 안산서원·안봉서원(安峰書院), 고흥의 성산사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형재집
(亨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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