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명 (李頤命) |
[ 1658년(효종 9) ~ 1722년(경종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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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아들 밀성군(密城君)의 손자이자 대사헌을 지낸 민적(敏迪)의 아들이다. [작은아버지 지평 이민채(敏采)의 양자로 들어갔다.] 1680년(숙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초배되었다, 1686년 사헌부의 집의로 있으면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박사·수찬·교리·응교,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이조좌랑, 의정부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1월 외직으로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8개월 만에 승지(承旨)로 발탁, 특별 승진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으로서 영해(寧海)에 유배되었으며, 1692년 남해로 이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南人)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기용되었다. 1696년(숙종 22) 평안도 관찰사로 지냈다. 1698년 대사간(大司諫)으로 형 사명(師命)의 죄를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아 공주(公州)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와 대사헌(大司憲), 한성부 판윤(判尹), 이조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705년에 우의정에 올라 숙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170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10여 년이 넘게 노론 정권의 핵심 인물로 크게 부각되면서 그 명망을 인정받았다. 1720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의 연경에 갔는데, 독일 신부 쾨글러와 포르투갈 신부 사우레즈(Saurez J.) 등을 만나 교유하면서 천주교 ·천문 ·역산(曆算)에 관한 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1721년(경종 1) 노론(老論) 영수 김창집(金昌集)과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등과 같이 세제(世弟, 英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주청, 이를 실현시키려 하였으나 소론(少論)의 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등의 반대로 그 결정이 철회되자 류봉휘(柳鳳輝) 등의 탄핵을 받고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많은 학자와 문신을 배출한 집안 출신으로 재능과 학식이 높아 주위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며, 공무에 있어서는 한치의 오차없이 엄밀히 처리하여 반대파인 소론측의 사람들도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성리학에 정통했던 석학으로서 당시 청나라의 실학사조와 서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국내에 소개하는 등 앞선 혜안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관작이 복구되었다. 과천(果川)의 사층서원(四忠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시 ·문을 엮은 "소재집(疏齋集)" 20권 10책이 전하고 또 "강역관계도설(疆域關係圖說)", "양역변통사의(良役變通私議)"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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