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혁명이라고도 한다.
우리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동학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1862년에 벌어진 진주
민란을 시초로 하여 삼남 지방의 농민들이 벌인 삼정 문란에 대한 반항에서
이미 싹터 있었다. 동학은 원래 외국 세력의 배척과 사회 개혁을 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농촌 사회에 그 교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계기 동학이 외세 배척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그 교세가 날로 커져
가자, 조정에서는 교조인 최제우(崔濟愚)를 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이에 교도들은
교조의 죽음이 억울하다 하여 그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펴게 되었다. 여러 고장에서 큰 모임을 열어 교조 신원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나쁜 짓을 일삼자, 농민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189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의 잘못을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 맞서게 된 것이다.
농민들과 합세한 동학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청·일 양국의 군대까지 출병하게 되고, 동학군은
그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하여 동학군 쪽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와
화해를 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일본군의
침략 행동이 강화되기만 하자,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영향 동학 운동은
비록 불리한 국제 정세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기세가 더욱 거세게 되었다.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