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부터 경사를 익혀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다가
1844년(현종 10) 전국 각지를 유람하여 구도행각(求道行脚)에 나섰다.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도를 닦던 중 185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다는 중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깨닫고, 그후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49일간의 기도를 한 후 술수를 터득했고, 도술을 부려 점차 기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1859년 경주에 돌아가 용담정(龍潭亭)에서 보국안민의 대도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를 시작하여 시천주의 사상를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하여 포교를 시작, 도를 천도라 하였다.
1862년 보국사(輔國寺)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등을 짓고
동학론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하여 점차 교세가 확장되자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을 두어 교도를 관장하였다. 1863년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北接大道主)로
삼은 뒤 도통을 계승시켜 교주로 삼았다. 1864년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게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사형,
1907년(융회
1)에
신원(伸寃)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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