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예천권씨은 득성 초기부터 후손이 귀했다.
6세 권섬(暹)이 3형제를 두었으나 첫째와 둘째가
후손을 두지 못해 세째 권군(權群)이 대를 이었다. 권맹손(孟孫)
: 권군의
아들, 공민왕 때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대동시림」을
남겨 가문을 빛냈지만 그도 후손을 두지 못해 아우 권유손(權幼孫)의
두형제가 대를 잇는다. 둘째 권선(權善)이 선대에 드물게
5형제를 두고 이들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서 가문이
번창하 여 조정에서는 예천권씨집안을 「五福門」이라 일컬었다.
권오행(五行), 권오기(五紀),
권오복(五福), 권오륜(權五倫),
권오상(權五常) 등 5형제중 권오복은 그중에서도 백미였다. 권오복(五福)은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성종17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에 뽑혔다.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공명에 연연하지 않은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는 8세손 권문해(文海)에게 이어졌다.
그는 일찌기 퇴계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주류로 예천권씨의 명성을 일으켰다. 명종 7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정언, 승지를 지내고 외직으로는 대구, 공주, 청주목사를
거쳤는데 가는곳마다 올바른 정사를 펴서 선정비가 세워 졌다.
그가 대구목사로 있을 때 단군조이래 선조조까지의 우리역사와
문화예술풍속 등을 총망라하여 1백7가지 운으로 분류, 저술한 「대동운부군옥」전20권을
편찬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오늘날 목판본 6백77매만 전해지고
있다. 권별(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