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부원군 권희의 아들이다.
이색과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367년(고려 공민왕
16) 성균시를 거쳐 다음해 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고, 우왕 때 응교, 좌사의대부, 성균대사성, 예의판서
등을 역임했다. 1375년(우왕 1)
정도전(鄭道傳),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친명정책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1393년(태조
2)
예문춘추관 학사·중추원사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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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정당문학, 참찬문하부사, 대사헌을 지냈고,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1등으로 길창부원구데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 의정부 찬성사, 세자좌빈객
등을 역임하고, 왕명으로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입학도설'은 후에 이황, 장현광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에도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했다. 성리학자로서 그의 '입학도설'은
후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입학도설', '동현사략', '오경천견록'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