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때부터 길재(吉再)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14) 사마시를 거쳐
1419년(세종 원년)
증광문과에 급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가 한때 해임되었다.
그 뒤 선산교수(善山敎授), 개령현감,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성균관
사예(司藝) 등을 역임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에 돌아가 후진교육에 전심했으며,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로서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아 아들 김종직(宗直)에게 잇도록 하여,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친상(親喪)
중에는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하여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소학"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자세는 길재(吉再)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 선산의 낙봉서원(洛峰書院), 고창의
운곡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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