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7년(효종 8) 진사(進士)가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이조좌랑을 지냈다. 당시 한당(漢黨)으로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되지 못하다가
1674년(현종 15)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南人) 허적(許積)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의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守禦使) ·도승지(都承旨) 등으로 특진되었다.
그 뒤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남인의 잔여세력을 꺾은 다음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82년 우의정으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으며, 이어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전익대(全翊戴)를 사주하여 허새(許璽)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하여 같은 서인(西人)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사 서인이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분열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공신의 호를 박탈당했다가 후에 복귀되었다.
숙종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식암집", 저서에 "해동사부(海東辭賦)"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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