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중종 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무원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
했다. 후에 정자,박사,설서,부수찬들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
현령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을 반대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도 정통했다.
문묘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 남원의 노봉서원, 옥과의 영귀서원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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