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하고,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평양 방위전에서 수탄장(守灘將)으로 대동강을 건너는
적병을 막은 공으로 평안도 방어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1594년 경상도방어사로
전직되었다. 이때 도적이 횡행하자 도원수 권율(權慄)의
명으로 도적을 소탕하고, 그 공으로 19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되었다.
군관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정을 정찰하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錄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으나, 1604년 다시 기용되어 포도대장
겸 도정(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 1)에 정주목사를
지내고 만포진(滿浦鎭) 첨절제사로 나갔다가, 1614년에 북로(北路)방어사가
되었다. 1618년 평안도 병마 절도사가 되었고,
이때 건주위(建州衛)의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원병을 이끌어 출전했다.
이듬해 삼다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부차에서 패전한
뒤 강홍립(姜弘立)이 전군을 이끌고 금나라 군대에 항복하여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몰래 적정을 기록하여 본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姜弘立)의
고발에 의해 사형당했다.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