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녹(祿)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 예문 검열이 되고 전객 부령에 전직,
강릉 대군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이
되었으나 찬성사 조일신(趙日新)의 무고로 유숙(柳淑)과 함께 파면되었다.
공민왕 6년 서북면홍두왜적 방어도지휘사ㆍ추밀원 직학사를 거쳐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서경운 상만호를 겸했다. 1359년 겨울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ㆍ정주ㆍ인주등지를 함락하자 서북면 도지휘사로서 도원수
이암(李 ),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마침내 서경이
함락되었다.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 전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공민와 10년에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삭주ㆍ이성으로
침입하자 서북면 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과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에
안우ㆍ이방실ㆍ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등과 함께 20만 정예를 거느리고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 10여만을 죽이고 개경을 수복, 잔적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의 간계로 정세운ㆍ안우가 모살되자, 그는
상양현에 숨었다가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 되었다.
문하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그 시체를 거두고 조위문을 지어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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