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청(惟淸)의 5대손이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번 토벌, 우달치[于達赤, 司門人]가 되었으며,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반란을 진압하여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
1354년 중국 장사성(張士誠)이 난을 일으키매 원이 원군을 요청하자
대호군대호군(大護軍) 에 임명되어 원정,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즉시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어 원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8참(站)을 수복하였다. 1358년 양광, 전라도 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선 4백여 척을 격파하였고, 1359년 4만의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 平壤)을 함락하자 1360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을
지냈다. 1361년 홍건적이 창궐, 개경(開京)까지 점령하자
안우(安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김변(金鏞의 난)을 진압, 진충분의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추대, 군사 1만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의주(義州)에서 섬멸했으며, 이어 박백야(朴伯也)가 연주(延州)에 침입하자
부하 장수를 시켜 격퇴했다. 1365년 강화(江華)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계림윤(鷄林尹)에 좌천되고 훈작(勳爵)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복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냈다. 1374년 제주(濟州)의 이른바 호목(胡牧)의
난에는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로 난을 평정,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元帥) 박원계(朴元桂)가 참패하자 출정을 자청,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찌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
서강(西江)에, 1378년 승천부(昇天府, 德)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李成桂) 등과
섬멸, 안사공신(安社公臣)의 호를 받았으며,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로서
왜구 때문에 서울을 철원(鐵原)으로 옮기려던 계획을 철회시켰다.
1381년 판삼사사를 거쳐 수시중·양삼사사가(領三司事)되고,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북변일대를 요동[遼東, 랴오둥]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계획,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遼東, 랴오둥]정벌이 좌절되고 이성계군이
개경(開京)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를 맞아 싸우다가 체포되어
고봉(高峰:高陽)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개경(開京)에서 참형(斬刑)당했다.
고려 구파세력의 마지막 거성으로 고려사를
사수하려던 강용, 청렴한 명장이었으나 신진세력 이성계(李成桂)에게 꺾임과
동시에 고려 5백년 왕조의 종막을 초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