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고종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헌납,교리,수찬,지평,필선,군수,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고,
1882년(고종 19)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이어 서북 경략사가 되고, 병조.
호조 판서를 지낸 뒤 양호순무사, 자헌대부, 공조판서를 지낸 다음
숭록대부 탁지부대신에 이르렀다.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는 당시 다난한 정국의 와중에서 오직 국가발전 향상에 노력하였고
민족적 자주성에서 외세를 경계하는 한편 원만한 외교접촉으로 일본
및 청나라에서도 그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명으로 일본 및 청나라의
문물을 시찰하고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을 만나고 온 그는 천진에
가서 한미수호조약을 검토, 청과의 새로운 통상조약을 협의, 임오군란
이후 한중 상민 수륙무역장정을 초안, 1883년 의주에서 청국대표 장석란과
중강 무역장정을, 회령에서 팽광예(彭光譽)와 회령 통상장정을 각각
체결하였다. 또한 그는 1893년 보은에서 최시형(崔時亨)과 담판하여 동학교도를
해산하고, 1896년 아관파천 때 보은으로 가는 도중 용인에서 친로파의
오해로 살해되었다.
저서에 '종정연표(從政年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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