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1년 내금위에 보직되고 1456년(세조 2)
무과에 장원 급제, 사복시 직장. 감찰을 역임하고, 1460년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회령부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좌대장으로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으로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를
칠 때 조선에 청병하자 좌대장으로 출전, 큰 공을 세워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받았다. 1469년(예종 1) 함경북도 절도사가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으로 두 차례나 영안북도 절도사를 지냈다.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147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건주위 정벌을 하게
되자 서정대장이 되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만포진에 이르렀으나 압록강의
해빙으로 도하작전(渡河作戰)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회군하자 명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대신들의 주장으로 양근에 유배당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이조판서, 동지중추부사, 영안도 순찰사를 역임하고 1488년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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