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 최한영의 아들이다.
15세때 광양 백운산
학사대암굴에서 경전과 춘추의 대의를 정통한 후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두 문하에서 수학했다.
1513년(중종 8) 진사로 친경별시문과 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 수찬에
보직, '일인유경보명유신(一人有慶 寶命維新)'이라는 옥홀 을
받고 사가독서하였다. 그 후 이조정랑·장령·의정부 사인 겸 경연시독관들을
지내면서 도덕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조광조(趙光祖).
김구(金絿) 등과
깊이 사귀면서 지치주의를 실현하려던 중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좌되어 동복으로 유배당했다. 1533년 풀려났으 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동복에 귀양살이 하면서 그곳 적벽의 절경이 중국
황주 의 적벽과 방불하다 하여 처음으로 '적벽'이라 칭명했다.
윤구(尹衢)·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삼결이라 일컬었고, 조광조(趙光祖),
양팽손(梁彭孫), 기준(奇遵)과 더불어 4학사라
불리었 다. 1876년 기정진(奇正鎭) 등 도내 사림이 청시회를 열었고,
정만조(鄭萬朝)의 시장에 사호 문절(文節)이라 했다.
광양의 봉양사,
동복의 도원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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