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李恒老)의 수제자이다.
조선 말기의 거유로서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68년(고종 5) 장령으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곧 사직하고 양주에 은거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다시 전국의 서원을 대폭적으로 철폐한 사실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공조참판에 승진하여 더욱 강경한 논조로 대원군을
탄핵했다. 이리하여 군부를 논박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75년 풀려나와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5조로 된 격력한
척사소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879년 풀려나와 1894년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극력 반대했고,
1898년(광무 2)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 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의 발령을 모두 사퇴했고, 국내의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과 매국역신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제자인 임병찬(林秉瓚) 등 80여 명과 함께 의병을 모집, 전라도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고,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저서에 '면암집(勉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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