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9년(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의 초시,
복시, 전시(殿試)에 장원,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三場)에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해 부수찬(副修撰)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 다음해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5년(성종 6) 이조정랑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장악원(掌樂院)의
관직을 겸임했으며, 1476년 문과증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했다. 1479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했다가 파직,
그 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호조참판을 지냈다. 뒤에 제학,
충청도 관찰사, 한성부좌윤, 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06년(중종
1)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함창(咸昌)에 은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산경(山經),
지지(地誌), 시문(詩文) 등에 모두 능했다.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뇌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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