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 용양위 부장 벽동군수 인산진 첨절 제사
강계부사를 거쳐 1583년 번호(藩胡)의 난에 조방장으로 길주 목사가
되었으나 위망(威望)을 시기한 장수의 무고로 서변에 유배 되었다.
곧 풀려나 전공을 세우고 순천부사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강화를 방어하였고, 충청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경기우도 방어사를 지냈다. 1599년 훈련 대장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집에 있을 때 특명을 받아 명나라 낙어병들의 반란을 계교로써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대장에 복관되고 이어 지중추부사 겸 지훈련원사 도홍관 등의
벼슬 로써 군국대사에 참여했다. 왕자가 관련된 살인사건을 가차없이
다루다가 선조 임금의 뜻에 거슬려 동래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도총관, 수원부사 겸 방어사,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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