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 박계현(啓賢)의 손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9년 봉교(奉敎), 이어
지제교(知製敎)·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副提學),
1607년(선조
40) 병조 판서, 1610년(광해 2) 형조 판서,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1618년 우의정(右議政) 겸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이어 좌의정, 1619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이인경(李寅卿) 일당이 경운궁(慶運宮)에 난입,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들의 난동을 저지했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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