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왕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다. 당시
예의사에서 관장하는 향사의 의식이 일정하지 못하므로 그가 고서를
참고, 사전(祀典)을 작성했다. 우왕 초 김의(金義)가 명의 사신을
죽이고 북원으로 도망했는데 김의의 종자가 돌아오자 이인임(李仁任), 안사기(安師琦)
등친원파가 대우를 극진히 하므로 그가 「김의가 명사를 죽인 죄는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인데 재상이 그 종자를 후대한 것은 안사기가 김의를
사주한 것이 분명하오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사직에 화가 미칠
것이다」고 상소하여 안사기를 처형케 했다. 이인임등이 백관과
연서하여 북원의 중서성에 글을 보내려 하자 그는 선왕이 이미 명을
섬기기로 하였는데 다시 북원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서명을 거절했다.
판전교시사로 있을 때 북원의 사신이 오자 또 상소, 원을 섬김이 불가하다하여
사신을 돌려보내게 했다.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친원파의
죄를 다스리라고 상소하다 도리어 연루, 장류 도중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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