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이 출중하였고 일찍이 자오시를 지어 부모 모실 날이 부족하다는
뜻을 말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아우 박제인(朴齊仁)과 함께
조식(曺植)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동문들과 강론 연마하여 학문이 오묘해지니 스승이 「함안의 고사는
난형난제다」라고 하였다. 안자의 사물잠과 주자의 십훈을 조석으로
보고 반성하면서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고, <효경론(孝經論)>을
지어 자여질을 가르쳤다. 천거로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의 판각이문화재로 지정되어쏙 추모재에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