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차수(次修), 재선(在先),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 위항도인(葦杭道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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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 박평의
서자이다.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實學)을 연구, 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 실학자들과 교유하며
1776년 합작(合作)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우리나라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 2)
사은사(謝恩使)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숙,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내편(內篇)에서는 실생활에 있어서의 기구와 시설의 개선을 다루고,
외편(外篇)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전박적인 모순점을 지적하여 서정(庶政)의 개혁 방안을 서술했다.
이듬해 정조(正祖)의 특명으로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고, 1790년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고, 다시 동지사(冬至使)를 수행하여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4년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1798년 왕에게 바치기 위해 북학의(北學議)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했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兇書事件) 주모자로 지목된 사돈 윤가기(尹可基) 사건에 연좌,
종성(鍾城)에 유배, 1805년 풀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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