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증영(增榮)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 1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후 천거를 받아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가 되고 감찰(監察) 공조 좌랑(工曹佐郞) 지평(持平)을 역임,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이 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사류(新進士類)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화를 입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가 의주(義州)에 이배(移配), 13년 후인 1532년 다시 안악(安岳)에
이배(移配), 1536년 풀려 나왔다.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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