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상주의 목사, 계림·화령의 부윤 등을
역임하고, 1376년(우왕 2)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어 진주에서 왜구 를
대파하였으며, 1378년 도원수로 승진되어 경산부에서 왜군을 대파 하였다.
그 후 이성계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1388년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함께 회군, 평리, 양광도 찰리사, 중군총제, 판삼사사 등을
거쳐 1392년 우시중에 이르렀다. 이때 정치가 혼란에 빠지고 민심이
이성계에게 귀일하므로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李成桂)를 조선 태조로 즉위케하였다.
그 공으로 순충분의개국좌명 1등원훈에 서훈, 성산백에 봉해지고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
성주 관하리로 돌아와서 목책을 세우고 둑을 막아 토지를 개간하는 등
백성 에게 영농의 혜택을 주어 지금도 배천, 배야, 배현 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진주도원수로 있을 때는 위북에 잣을 심게 하여 진주인에게
혜택을 주었으므로 이를 시중백이라 칭하였다 한다. 67세 때 죽으니
왕이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정사를 멈추고 장례를 치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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