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2년(세조 8) 생원에 합격한 뒤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하였고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봉상시 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한 후 1480년에 거창현감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4년 장령(掌令)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시(詩) ·문(文) ·글씨(서(書))에 뛰어나 당대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성종(成宗)으로부터 지극한 총애(寵愛)가
지극하여 경관직(京官職)에 있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관직(外官職)으로
나가려 할 때 성종이 만류하다 못해 석별의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士林派)에 속하였다.
장수(長水)의 창계서원(蒼溪書院)과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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