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培材學堂)·흥화학교(興化學校) 및 평양장로신학교(平壤長老神學校) 등에서
공부했다. 1909년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고,
이듬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 1914년 중국 난징[南京]에
건너가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했다. 협화서국에 근무하면서 교민단
단장에 선임되고, 1918년 파리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 김규식(金奎植)을
한국대표로 보냈다. 이듬해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 해 겨울 일본이 조선의 자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張德秀) 등과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야의
각계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20년 고려
공산당에 가입,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 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손문(孫文)과 협력하여 중국혁명을 추진했고,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 왜경에 인도되어 장기를 거쳐
본국에 압송, 3년간 복역했다. 1933년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1944년 조선건국연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해방되자 건국연맹의 기반을 확대하여 조선건국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부주석이 되었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점령군 당국의 인정을 얻지 못해 실패했다.
12월 인민당을 조직, 이듬해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
미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으나 지나친 좌경에 반대하고
탈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좌파 온건세력을 규합, 정치 활동을 하다가
1947년 7월 19일 한지근(韓智根)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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