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에 통달했으며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탐독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이듬해 명나라 군사를 도와 평양 수복에 공헌,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을 모집, 3천 석의 군량을 조달, 그 공으로 예빈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10년(광해 2)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생들을 이끌고, 문묘의 위패를 모시고 피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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