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2년 후 선전관이 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보좌, 안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후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의 심양에 다녀왔고,
1628년 봉산군수, 1631년 길주목사로 있다가 덕천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635년 창성부사 의주부윤을 지내고, 다음해 춘신사로
다시 심양에 가 있을 때 마침 후금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즉위식을거행하자
그에 대한 하례를 거부했다가 구타를 당한 후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받아 가지고 귀국했다. 그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있어 황제참칭의
글을 받아왔다고 조정의 척화론자들로부터 논핵을받았으나 김상헌(金尙憲)의
변호로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앞서 심양에서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용서를 받고 삼도 통어사(統禦使)에 특진,
1639년에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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