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에 급제,
1122년(예종 17) 합문지후로서 최사전(崔思全)의 모함으로 권신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형 공인, 가관과 함께 유배, 뒤에복직되어 사신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1133년(인종 11) 시어사로서묘청(妙淸)의 도참설에 현혹된 인종에게
상소를 하다 충주목 부사로 좌천되었다. 1148년(의종 2) 시우산
기상시, 보문관 학사, 서북면병마사를 거쳐 이듬해 시형부상서, 판삼사사에
이르렀다. 1151년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형부상서, 동북면
병마부사를 지내고 남평개국자에 식읍 3백호를 받았다.
글씨에
능하여 묘향산 보현사 창사비문을 썼다. 그의 서풍은 당송간에
드날렸으며, 서체는 북송의 4대가 채양(蔡襄)의 서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을 사렸고 해서 전성시대에 행서 비문으로 희유 가치가 있다.
남평의 장연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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