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9년 요경과에 급제,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등과 정몽주(鄭夢周)를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산원으로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공이 커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로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1397년 자헌대부에 오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판공조사, 동지절제사가 되고, 1401년
익대좌명공신1등에 올랐다. 그 후 판승추부사, 삼군부사, 권행의정부사를
거쳐 1403년 대광보국 숭록대부 판승추부사, 병조전서를 겸하고,
1405년
우의정, 1408년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태종이 그의 영정을 그려
장생전에 영구보존토록 했다.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광주 동촌으로
내려가 마을 앞 바위에 "휴(休)"자를 쓰고 또 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에 올라 매일 대궐 있는 쪽을 향해 배례하니 후인이 그 고개를 망조현이라
이르고 그 마을을 퇴촌이라 불렀다. 1414년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친히 문병하려고 행렬이 시작되었을 때 부음을
듣고 행차를 중지, 철조삼일하고 대언 한상덕(韓尙德)으로 하여금 제문을
보내어 치제토록 했다.
그 후 친히 묘를 찾아 조위하면서 충무의
시호를 내렸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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